원칙대로 살아왔는데 왜 내가 무너졌을까
원칙적이고 철저한 사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감정을 차단하고 버텨온 대가로 불면, 무기력, 우울이 찾아옵니다. 이건 나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버텼기 때문입니다.
이지윤
한방신경정신과 전문의
핵심요약 3줄
- 원칙을 지키고, 계획대로 살고, 모든 걸 철저하게 해온 사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 원칙이 나를 지키는 게 아니라 나를 조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쉬라고 해도 쉬지 못합니다. 휴직을 했는데도 출근하는 꿈을 꾸고, 수업하는 꿈을 꿉니다. "이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쉬는 것 자체가 불안합니다.
- 이건 나약해서 무너진 게 아닙니다. 너무 오래, 너무 뜨거운 온도에서 버텼기 때문에 무너진 겁니다.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요"
진료실에 오시는 분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저는 원래 되게 밝고 감성적인 사람이었어요. 근데 일하면서 바뀌었어요. 원칙대로 다 처리하고, 감정 차단하고, 단호하게 살아야 살아남더라고요."
한때는 사람들 감정에 공감하고, 눈치도 보고, 상처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직장에서, 학부모 앞에서, 동료 사이에서 그렇게 살면 남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꿨습니다. 원칙대로.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감정은 접어두고.
그게 처음엔 나를 지켜줬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니까 그 갑옷이 나를 조이기 시작한 겁니다.
왜 원칙적인 사람이 더 잘 무너질까요?
원칙이 나쁜 게 아닙니다. 문제는 유연성 없이 원칙만 남았을 때입니다.
예외를 허용하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원칙대로 안 되는 일이 매일 발생합니다. 학부모가 무리한 요구를 하고, 동료가 규정을 안 지키고, 학생이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원칙적인 사람은 이 예외 상황 자체가 스트레스입니다.
"이건 이렇게 해야 맞는 건데." "왜 안 지키지?" "내가 양보하면 전례가 되잖아."
이 생각이 머리에서 안 떠나고, 양보하면 양보한 것 때문에 스트레스, 안 하면 안 한 것 때문에 갈등. 어느 쪽을 선택해도 불편합니다.
쉬는 것도 원칙 위반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쉬는 것은 일탈입니다.
휴직을 했는데 편하지 않습니다. "나는 일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살아온 적이 없는데" — 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합니다.
밤에 자면 출근하는 꿈, 수업하는 꿈을 꿉니다. 깊이 잠들지 못하고 중간에 깨고, 충분히 잤는데도 아침에 일어나지 못합니다. 몸은 쉬라고 하는데 뇌는 아직 출근 중입니다.
다른 분들이 휴직하면 "드디어 쉰다!" 하고 좋아하는데, 이 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쉬면서도 은은하게 계속 불편합니다.
감정을 차단한 대가를 치릅니다
원래 감성적인 사람이 환경 때문에 이성적으로 바뀐 경우, 안에서는 여전히 원래의 감정이 살아 있습니다. 상처받고, 서운하고, 힘든 감정들이 존재하는데, 겉에서는 "원칙대로" "단호하게"로 덮어놓은 겁니다.
이게 뼈를 깎는 노력이었다는 걸, 본인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력이 한계에 도달하면, 덮어놓았던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옵니다. 공황, 불면, 무기력, 우울. "나는 왜 이러지? 나는 이런 사람 아닌데?" — 이 당황스러움이 증상을 더 키웁니다.
쇠를 단련하려면 높은 온도가 필요합니다
제가 이런 분들께 드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쇠를 단련하려면 아주 높은 온도에서 두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단단해집니다. 실제로 이 분들은 그 과정을 거쳤습니다. 스트레스받는 환경에서, 성격을 바꿔가면서, 원칙을 세워가면서 자기를 단련했습니다.
그런데 온도가 너무 높으면 쇠도 녹습니다.
지금은 그 상태입니다. 너무 오래, 너무 뜨거운 온도에서 버텼기 때문에 잠깐 식혀야 하는 시점. 이건 실패가 아닙니다. 단련 과정의 일부입니다. 식히고 나면 더 단단해집니다.
이 패턴에 해당되는 분들의 특징
| 항목 | 해당 여부 |
|---|---|
| "이건 이렇게 해야 맞다"는 생각이 강하다 | |
| 예외 상황이 생기면 불편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 |
| 쉬고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 |
| 꿈에서 출근하거나 업무를 한다 | |
| 원래는 감성적이었는데 일하면서 바뀌었다 | |
| 감정을 잘 안 드러내는 편이다 | |
| "나약하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더 버틴다 | |
| 주변에서 쉬라고 해도 쉬는 게 불편하다 |
세 개 이상 해당되신다면, 지금 무너진 게 아니라 무너지기 직전에 몸이 먼저 브레이크를 건 것일 수 있습니다.
한방신경정신과에서의 접근
"그만둬야 하나요?"에 대한 답
먼저 말씀드리면 — 대부분의 경우 그만두지 않아도 됩니다.
원칙적인 성향의 분들은 오히려 공무원, 교직 같은 구조화된 직업이 잘 맞습니다. 자영업이나 변수가 많은 환경으로 가시면 더 안 맞으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문제는 직업이 아니라, 온도가 너무 높았던 것입니다. 식히고, 회복하고, 다시 돌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당장 그만두면, 이 분들 성향상 "그만뒀다"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스트레스가 됩니다.
수면부터 잡습니다
출근하는 꿈, 수업하는 꿈 — 이건 뇌가 각성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깊은 수면에 들어가지 못하고, 뇌가 밤에도 일하고 있는 겁니다.
한약으로 과각성된 신경을 안정시키고, 양약(수면제 계열)은 점차 감량해갑니다. 이미 복용 중인 경우 갑자기 끊지 않고, 반으로 줄이고, 격일로 줄이고, 빼는 방식으로 단계적으로 진행합니다.
자율신경 회복
원칙적으로 살아온 분들은 교감신경이 만성적으로 과항진되어 있습니다. 항상 긴장하고, 항상 경계하고, 항상 "제대로 해야 해"라는 모드. 이 상태가 몇 년씩 지속되면 자율신경 균형이 무너집니다.
HRV 검사로 현재 상태를 확인하고, 한약과 침 치료로 과긴장 상태를 내려줍니다.
"쉬어도 괜찮다"를 체득합니다
이건 약만으로 안 됩니다. 상담을 통해 "쉬는 것은 일탈이 아니다" "원칙을 내려놓아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를 경험해야 합니다.
원칙적인 분들은 "내 마음 편한 대로 하는 것이 맞다"는 결론을 머리로는 내리지만, 몸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몸을 먼저 안정시키고(한약, 침), 그 다음에 마음의 유연성을 넓히는(상담) 순서가 중요합니다.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한 가지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치료의 목표는 "원래의 감성적인 나"로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그때의 나는 상처받기 쉬웠고, 그래서 바꾼 것이니까요.
목표는 원칙도 지키면서 유연성도 가진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하되, 예외가 생겨도 "그럴 수 있지"라고 넘길 수 있는 상태. 원칙이 나를 지켜주되, 나를 조이지는 않는 상태.
그게 가능합니다. 지금은 온도가 너무 높아서 잠깐 녹은 것뿐입니다.
식히고 나면, 더 단단해진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